“국가의 적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복싱에서 상대를 K.O시키듯이 하는 것 뿐이다. 수단은 상관없다.”
Idi Amin Dada Oumee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19??년 경 ~ 2003년 8월 16일
아프리카의 히틀러로 불린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 중부 내륙국 우간다의 3, 4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인데, 동서 고금의 숱한 독재자들 중에서도 잔혹함과 엽기스러움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가히 그 짝을 찾기 힘든 미친놈이다.
아프리카 자체가 제대로 된 출생연도 기록이 없기에 1923년, 1925년, 1928년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뭐 5세 정도로 큰 차이는 아니다.
이디 아민은 1946년 영국 육군의 식민지군 부대인 킹스 아르피칸 라이플스에 입대했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는 케냐에서 반영 민족운동 비밀결사 진압에 참여했고, 1961년에는 육군 중위로 승진한다.
(그는 자신이 강제로 영국군에 끌려갔다고 주장하면서 2차 세게대전 당시 버마 전투에 참가했다고 했지만, 애초에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하면서 입대년도가 1946년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1962년에는 우간다가 독립을 하게 됐고, 1964년 육군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 총리 밀턴 오보테를 도와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데 동참한다.
이때 쿠데타가 일어난 우간다에는 좌파정권이 들어섰는데, 쿠데타에 동참한 이디 아민은 1967년 군 통수권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로지 권력욕으로만 가득찼던 이디 아민은 더 많은 권력을 원하고 있었고 1971년 밀턴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가하고 있을 때 군대를 모아 다시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고 우간다의 권력을 잡는다.
당시는 한참 냉전 시절이라 서구 국가들은 우간다의 좌파 정권이 무너진 것을 환영했고, 영국과 이스라엘은 이디 아민의 정권을 바로 인정해버린다.
서구 국가들의 침묵과 인정에 힘입은 이디 아민은 본격적으로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한다.
숙청 대상은 주로 밀턴 오보테를 지지했던 세력들인데, 이날 숙청으로 약 3,000여 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살해당했고, 오보테를 지지했던 주민들과 그들이 살던 마을은 황폐화 되버린다.
이후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는 권좌에 있던 8년간 무려 30~50만에 이르는 국민들을 학살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이디 아민이 가장 미쳐 돌아갈때 한 짓들.
위 사진은 이디 아민 시절 감옥의 모습이다.
이 감옥의 복도에는 전류가 흐르는 물로 가득 차 있어서 탈옥을 시도했다가는 바로 감전사했는데, 이 감옥에서만 무려 2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디 아민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누구는 무죄고 누구는 고통 받다가 총살당하거나 쇠망치에 맞아 죽는 처벌을 내렸는데, 특히 이디 아민이 직접 고안한 고문들은 정말 악명 높았다.
그는 남자의 경우 성기를 쇠꼬챙이로 찍거나 잘랐고..
여자의 경우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지독한 성고문을 가했는데..
이런 고문 과정에서 죽은 시체들은 악어에게 던져주거나 비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동물학자들은 우간다의 악어들은 애써 사냥을 할 필요가 없어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할 정도로 게을러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교도소의 죄수들은 빽빽이 못이 박한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했고, 한 죄수를 묶어놓고 다른 죄수로 하여금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게 하거나, 며칠간 굶긴 그들에게 다른 죄수의 시체를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이 밖에도 살아 있는 사람을 탱크로 뭉개버리거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거나, 시체의 팔다리를 절단해 바꾸어 붙이거나.. 정말 미친 짓을 저질렀다.
특히 식인을 했다는 썰도 있는데, 젊은 여자는 처형 후 성기를 도려내 먹었다거나 인육을 먹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진위는 알 수가 없다.
이디 아민은 외교적으로도 미친 짓을 일삼았는데,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를 쳐 외교 사절에게 권하기도 했고, 모든 공문서에는
각하, 원수,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 속 모든 물고기들의 신,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
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세지를 담은 전보도 보냈다고 한다.
권력의 위임 없이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가장한 사실상 자신의 변덕에 맞춰서 통치한 이디 아민은 좋았던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한순간에 파탄 내버리는데…
우간다는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이스라엘과 각별한 사이로 유대인들도 제법 우간다에서 살고 있었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도 해줄 정도였다.
이디 아민도 집권 초기에 이스라엘과 각별한 사이를 내세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무슬림임을 선언하며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한다.
더 나아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 특히 아프리카화 캠페인을 주장하며 아시아인과 인도인을 내쫓았다. (이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노동자로 와서 우간다의 경제를 좌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국 소유의 기업을 국영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우간다는 경제가 파탄났음에도 이디 아민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주변 아프리카 정권들 덕분에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아프리카통일기구)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한다.
(당시 아프리카 대부분은 우간다와 비슷하지만, 막장짓을 그나마 덜하는 수준의 독재정권이었기에..이디 아민을 지지했고..)
이 미친 독재자는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무마하기 위해 탄자니아를 침공하는데, 탄자니아군의 반격으로 수도가 점령당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망명지로 택하고 사우디 정부가 내준 집에서 살다가 고혈압과 심경마비로인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반이스라엘로 뜻이 맞던 카다피도 그를 환영하지 않아 리비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장법 특성인지 그의 불명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도 묘비도 없이 위 사진 같은 황량한 곳에 묻혔다.
이후 1980년작인 <이디 아민>그리고 2006년작인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 한국에선 라스트 킹>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덧붙여 이디 아민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우간다의 국민들은 몇날 며칠을 축제로 보낼 정도로 기뻐했었고, 반이스라엘, 이슬람을 자처해 이슬람 국가들과 친분이 있었지만 일부는 쿠란을 모독한 이슬람교도의 망신이라며 그를 혐오했다. (망망할때 카다피조차도 환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