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최강의 무적 기병대였던 폴란드의 ‘윙드후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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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폴란드왕실의 근위경기병대가 창설된다.

초기에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는 평범한 기병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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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와 러시아의 전투)

1514년 러시아군 8만여명을 불과 4만의 병력으로 격파하면서 유럽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출신이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인 ‘스테판 바토리대왕’은 러시아와의 전투의 승리를 보고 근위경비대에 대한 개혁을 시작하게 된다.
개혁으로 인해 기존의 중기병들 보다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하게 되었고 무장 또한 경기병에 맞지 않게 두꺼운 갑옷을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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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경비대의 이름은 ‘윙드 후사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황금기의 화려한 시작을 만들어준 최강의 기병이 되겠다.
당시 유럽이 쓰던 총은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쓰던 총과 다를게 없었고 그들에게 일본군같은 전술 또한 없어서 기병의 돌진은 엄청난 약점이되었고 윙드 후사르가 전성기를 맞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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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를 넘어 유럽역사상 최고의 기병대장으로 평가받는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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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코드키에비츠’가 지휘하는 3천5백명의 폴란드군은 스웨덴 왕 ‘칼9세’가 지휘하는 1만 1천명의 스웨덴 군을 상대로 이기게 된다.
이 전투에서 승리의 주역은 윙드 후사르였다. 단 300명으로 스웨덴 보병 8200여명을 휘어잡으며 20분만에 승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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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쿠쉰 전투’에서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지휘하는 7천명의 폴란드군이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4만명을 상대로 이겼다.
이 전투 또한 5600명의 윙드 후사르기병의 활약이 돋보였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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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에게 점령당한 모스크바)

쿠쉰 전투에서 승리한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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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체초롱 전투’ 에서는 300명의 윙드 후사르 기병이 오스만 제국 기병 1만 5천명을 퇴각시킨 전투로 오스만제국에 윙드 후사르의 이름을 알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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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스만제국은 1621년 코침에서 오스만 제국군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를 보내지만 말도 안될 정도로 윙드 후사르에게 전멸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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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시파히 기병대)

윙드 후사르 기병은 오스만 제국의 ‘시파히 기병대’와도 막상막하로 싸우며 ‘코침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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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의 최대 영토)

그러나 100년간의 전투에서 무패 신화로 유럽을 휘어잡았던 윙드 후사르 기병에게도 패배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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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아돌프)

윙드 후사르에게 첫 패배를 맛보여준 사람은 바로 스웨덴을 강대국 반열에 올린 명군이자 명장인 북방의 사자 ‘구스타프 아돌프’였다.

1621년부터 시작된 스웨덴-폴란드간의 전쟁은 근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이자 윙드 후사르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발판이 되었다.

1629년 회니히펠데에서 ‘코니에츠폴스키’가 지휘하는 윙드 후사르들이 스웨덴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만들어내며 그간의 패배를 설욕하는데 성공했지만 계속된 전쟁과 오스트리아,러시아,오스만,스웨덴이라는 강대국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실정이라 점차 강대국들과의 전투에서 패하며 영토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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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스웨덴 등에게 점령 당한 영토,-대홍수시기-)

 

결국 1655년 스웨덴의 침공을 시작으로 ‘대홍수’라 불리는 폴란드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윙드 후사르는 ‘코사크’를 상대로 한 ‘주태 보디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가까스로 대홍수시기는 멈췄지만 예전의 폴란드가 아니었다. 폴란드는 강대국에서 밀려나고 인구 1/3을 잃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도 있었다. 1683년 오스만제국의 오스트리아 침공으로 폴란드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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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한 15만의 오스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되고, 이 전투가 바로 ‘빈전투(비엔나 공방전)’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 기병의 돌격이 비엔나 공방전에서의 윙드 후사르가 모티브라고 한다.)

‘빈’을 구원하며 ‘크리스트교 세계의 방파제’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폴란드의 내부는 혼란스러웠고 1696년 ‘얀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한 이 후 폴란드는 가속도로 몰락했다.

그후 윙드 후사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정찰대로 변했고 무장 또한 빈약해졌다.

그리고 1775년 윙드 후사르는 정식으로 해체된다.

그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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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폴란드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나폴레옹의 군대와 함께 싸웠는데, 그중 후사르의 후예인 ‘율린 창기병’은 적군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선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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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아니면말고 에디터 <제보 및 보도자료 https://woriclass.co.kr/ 저작권자(c) 우리학교클라스>

출처 – https://www.fmkorea.com/650568315